3. 메모 하나 : 호머의 서사시에서처럼 영원한 안식처인 고향(이념)을 향해 고단한 귀향길에 오르는 현대판 오딧세이(현실)에 관한 이 영화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해,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세기말 독일판 무비 버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혹자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끝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 시대 좌파의 이율 배반에 관한 루카치 버전이라 할 지도 모르겠다.
4. 메모 둘 : '지상 최대의 거짓말'을 헤드 카피로 뽑은 이 영화의 가장 큰 거짓말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전도시켜 버린 데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시니피에)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하는 아들(시니피앙)의 눈물겨운 역회귀를 스토리라인으로 갖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현실과 이념의 관계에 관한 도착적인 설정 위에서만 구축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 메모 셋 : 자본의 논리가 스크린의 황금율로 굳어진 지 오래이지만, 관객에 대한 불친절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영화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른바 예술 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와 맞닥뜨릴 때 나는 나의 아둔함 때문에 당혹스럽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 몇 겹의 베일을 걷어내고 내밀한 속이야기를 향해 나아가려 하지만, 나는 항상 그 핵심에 다다르는 데엔 실패하고 만다. 굿바이 레닌의 메타포는, 관객을 향한 뻔뻔한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나같이 맹하고도 아둔한 관객조차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소박하면서도 단순하다.
6. 메모 넷 : 작은 충격에도 혈류를 멈추어야 할 만큼 동맥 경화에 시달리고 있던 크리스티아네의 심장은 이미 현실 적합성을 상실해 버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풍자적 은유이며, 알렉스의 탈주는 현실과 이데올로기 간의 메꾸기 힘든 간극의 상징이다. 8개월 간의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크리스티아네가 가까스로 다시 걷기 시작해 처음 거리로 나섰을 때 그녀가 보게 되는 것은 철거되는 레닌의 동상이다. 이 잔인한 역설을 통해 영화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사후(事後)적으로 승인한다. 현실 적합성을 상실한 이념이 더 이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은, 이 영화에서 크리스티아네의 쓰러짐과 짧은 소생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죽음의 과정과 일치한다.
7. 메모 다섯 : 사실, 이 영화에 대한 짧은 몇 마디를 위해 메타 담론을 끌어다 붙이는 것은 천박한 지적 허영에 불과하다. 그저 알렉스가 라라를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의 너무도 뻔한 우연을 문제삼지 않을 아량만 있다면, 당신의 눈물샘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눈물겨운 거짓말이라는 이 영화의 설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자극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극에서 비롯되는 감동은 과장과 비약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생활 논리에 밀착한 채 담담히 진행되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배가될 것이다.
8. 메모 여섯 : 그러나 당신이 최소한의 진지함과 통찰력을 갖춘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본 후 당신의 기분은 개운하지 못할 것이다. 한 줌의 재가 되어 공중에 흩뿌려질 수밖에 없었던 크리스티아네의 주검처럼 사회주의란 결국 신기루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자본주의의 음험한 선동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이같은 선동이 얼마나 악의적인 것인지를.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도착적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서 내러티브를 구축해야만 했다. 물구나무 선 이 영화 속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당신의 심미안 또한 물구나무 서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