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의미, 그리고 해석 I
* 이 글은 조너던 컬러의『문학 이론』4장을 요약한 글이다.
이 글의 요약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는데,
1~6 까지는 내가 붙인 소제목으로 원텍스트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원텍스트에는 없는 황동규의 시를 제외하고
1~6 까지는 본문의 내용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요약하려 한 것이고,
말미에 추가된 소제목 7의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덧붙임이다.
1. 문학, 그리고 언어
문학은 특수한 형태의 언어인가, 혹은 특별한 언어 사용인가? 문학은 특이한 방식으로 조직된 언어인가, 혹은 특수한 권력을 인정받은 언어인가? 이같은 논쟁에서 보듯 언어의 성격과 역할, 그리고 언어를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이론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같은 핵심적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의미의 문제를 통해서 조명될 수 있다. 다음 시를 보자.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강에는 살없는 고기들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선 문득 암호(暗號)만 비쳐요. 읽어 봐야 소
용없어요. 혀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
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곳곳에 쳐 있는 세(細)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
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쟎아요.
- 황동규, [楚歌]
이 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살 없는 고기들'이나 '혀잘린 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다는 진술은 '단백질 덩어리 근육이 전혀 없는 고기들이 강을 유영한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동물이 아닌 화초가 '혀를 잘리었다'는 진술 역시 타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시적 진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텍스트는 독자의 참여를 끌어낸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에의 참여는 '의미'에 관한 단답형의 답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의미에 관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다른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다른 차원은 단어의 의미와 발화의 의미와 텍스트의 의미로 나뉜다. 단어의 의미는 발화 속에서 그 단어들이 갖는 의미로부터 나온다. 텍스트는 저자가 구성한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텍스트의 잠재력에 있다.
2. 언어학의 대상으로서의 언어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미는 차이에 기초해 있으며, 소쉬르가 말한 바 언어는 바로 이 차이의 체계이다. 즉, 언어 기호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그것이 "다른 기호가 아닌 것에 놓여 있다".이 자의적인 기호 체계에서 핵심적인 사실은 첫째, 기호(이른바 단어)는 형식(시니피앙)과 의미(시니피에)의 결합이며, 형식과 의미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유사성이 아니라 관행에 토대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기호가 지닌 자의적 성격의 두 번째 측면으로서, 기표(형식)와 기의(내용) 모두 소리의 차원과 사고의 차원에서 각각 관행에 따라 스스로 분리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 하면 언어는 소리의 차원과 사고의 차원을 다르게 분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쉬르적 관점에서 언어 코드는,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범주들에게 그 나름의 이름을 제공하는 '명명법'이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구획하는 이론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앞의 인용시로 돌아가 보자.
…풀잎 뜬 강에는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
선 문득 암호(暗號)만 비쳐요. 읽어 봐야 소용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이 시에서 시인이 '풀잎 뜬 강'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가 '쓰레기 가라앉은 강'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범주에 명칭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나름의 범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현실의 파악을 위해 독자와 화자는 그들의 언어 환경을 통해 그 언어의 주변을 살펴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습관적인 사유의 방식이 주는 환경이나 범주를 탐구하고, 그것들을 굴절시키고 변모시키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언어가 이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것을 어떻게 하면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는지를 보여주고 무심하게 세계를 바라보던 그런 범주들에 관심을 갖도록 강요한다. 이런 까닭에 언어는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표명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심문하고 해체하는 공간이 된다.
언어학은 발화 사건이나 파롤(발화/글쓰기)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이면의 어떤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언어학은 발화가 화자에게 갖는 형식과 의미에 관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언어학자는 발화된 문장들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이는 달리 말해 언어학자의 탐구는 문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다른 진정한 의미를 찾는 데 바쳐짐을 의미한다. 언어학의 과제는 개별 문장의 (다른 문장들과의 차이로 인해) 입증된 의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의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다.
3. 언어학과 문학 연구의 두 가지 모델
문학 연구는 언어학을 모델로 해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을 의미로 설정하고 그 의미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입증하려는 시학과, 형식과 더불어 출발하면서 형식을 해석하고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주는 해석학으로 나뉜다. 시학은 입증된 의미나 효과가 어떻게 획득되었는지를 물으며, 해석학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새롭고 보다 나은 해석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언어학적인 모델은 문학 연구가 시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학 작품이 자신이 얻어낸 효과를 어떻게 성취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현대 비평 전통은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여 개별 작품의 해석이 문학 연구의 결정적 요소가 되도록 만든다. 반면 문학적 능력을 기술하는 시학은 문학적인 구조와 의미를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관행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시학과 해석학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모호한 공통 분모들, 이를테면 텍스트에서 산편적으로 제공되어진 세부 사항으로부터 '등장 인물'을 창조해 내고, 문학 작품의 주제를 인식하고, 시와 스토리 사이의 의의를 측정할 수 있게끔 상징적 해석 형태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인지 따위의 질문들로 인해 오해가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 하면 '나는 배가 고프다'와 '나는 배가 아프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식처럼 확연하게 문학 작품의 의미가 파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에 있어서는 주어진 것으로서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현대 문학 비평이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시학은 개별 작품의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관행의 설명에 치중한다. 그리하여 시학은 독자들이 갖고 있는 문학적 능력을 해명하는 것에 열중한다. 문학적 능력이라는 관념은 독자와 텍스트의 상호 작용이 만들어내는 지식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독자 반응 비평으로 나아가는데, 이 비평 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의 의미란 독자의 경험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작품의 해석은 문학 작품이 독자와 만나는 일련의 방식 속에서 독서 스토리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시 이같은 독서 스토리는 문학 텍스트를 결국 독자의 '기대 지평'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이랬을 때 '독자 반응 비평'은 개별 문학 작품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특별한 종류의 대답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이 경향에 따르면, 문학 작품은 '계급투쟁','통합 경험의 가능성','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전복적인 에너지의 봉쇄','젠더 관계의 불균형', '텍스트의 자기 해체적 성격','제국주의의 폐색','이성애주의의 모태'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