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onful의 Blue World

'텍스트 읽기의 최저 낙원/담론과 현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1.08 언어, 의미, 그리고 해석 I
  2. 2008.11.08 언어, 의미, 그리고 해석 II
  3. 2008.11.08 [요약] 헤겔미학입문


언어, 의미, 그리고 해석 I

  


  * 이 글은 조너던 컬러의『문학 이론』4장을 요약한 글이다. 
   이 글의 요약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는데,
   1~6 까지는 내가 붙인 소제목으로 원텍스트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원텍스트에는 없는 황동규의 시를 제외하고
   1~6 까지는 본문의 내용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요약하려 한 것이고,
   말미에 추가된 소제목 7의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덧붙임이다.


 


  1. 문학, 그리고 언어

 

   문학은 특수한 형태의 언어인가, 혹은 특별한 언어 사용인가? 문학은 특이한 방식으로 조직된 언어인가, 혹은 특수한 권력을 인정받은 언어인가? 이같은 논쟁에서 보듯 언어의 성격과 역할, 그리고 언어를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이론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같은 핵심적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의미의 문제를 통해서 조명될 수 있다. 다음 시를 보자.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강에는 살없는 고기들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선 문득 암호(暗號)만 비쳐요. 읽어 봐야 소
      용없어요. 혀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
      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곳곳에 쳐 있는 세(細)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
      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쟎아요.  
                                                                                      - 황동규, [楚歌]

 

  이 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에서 '살 없는 고기들'이나 '혀잘린 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다는 진술은 '단백질 덩어리 근육이 전혀 없는 고기들이 강을 유영한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동물이 아닌 화초가 '혀를 잘리었다'는 진술 역시 타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시적 진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텍스트는 독자의 참여를 끌어낸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에의 참여는 '의미'에 관한 단답형의 답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의미에 관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다른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다른 차원은 단어의 의미와 발화의 의미와 텍스트의 의미로 나뉜다. 단어의 의미는 발화 속에서 그 단어들이 갖는 의미로부터 나온다. 텍스트는 저자가 구성한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텍스트의 잠재력에 있다.  


  2. 언어학의 대상으로서의 언어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미는 차이에 기초해 있으며, 소쉬르가 말한 바 언어는 바로 이 차이의 체계이다. 즉, 언어 기호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그것이 "다른 기호가 아닌 것에 놓여 있다".이 자의적인 기호 체계에서 핵심적인 사실은 첫째, 기호(이른바 단어)는 형식(시니피앙)과 의미(시니피에)의 결합이며, 형식과 의미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유사성이 아니라 관행에 토대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기호가 지닌 자의적 성격의 두 번째 측면으로서, 기표(형식)와 기의(내용) 모두 소리의 차원과 사고의 차원에서 각각 관행에 따라 스스로 분리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 하면 언어는 소리의 차원과 사고의 차원을 다르게 분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쉬르적 관점에서 언어 코드는,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범주들에게 그 나름의 이름을 제공하는 '명명법'이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구획하는 이론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앞의 인용시로 돌아가 보자.

 

         …풀잎 뜬 강에는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
      선 문득  암호(暗號)만 비쳐요. 읽어 봐야 소용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이 시에서 시인이 '풀잎 뜬 강'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가 '쓰레기 가라앉은 강'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범주에 명칭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나름의 범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현실의 파악을 위해 독자와 화자는 그들의 언어 환경을 통해 그 언어의 주변을 살펴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습관적인 사유의 방식이 주는 환경이나 범주를 탐구하고, 그것들을 굴절시키고 변모시키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언어가 이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것을 어떻게 하면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는지를 보여주고 무심하게 세계를 바라보던 그런 범주들에 관심을 갖도록 강요한다. 이런 까닭에 언어는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표명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심문하고 해체하는 공간이 된다.              


   언어학은 발화 사건이나 파롤(발화/글쓰기)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 이면의 어떤 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므로 언어학은 발화가 화자에게 갖는 형식과 의미에 관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언어학자는 발화된 문장들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이는 달리 말해 언어학자의 탐구는 문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다른 진정한 의미를 찾는 데 바쳐짐을 의미한다. 언어학의 과제는 개별 문장의 (다른 문장들과의 차이로 인해) 입증된 의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의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다.  


 3. 언어학과 문학 연구의 두 가지 모델

 

   문학 연구는 언어학을 모델로 해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을 의미로 설정하고 그 의미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입증하려는 시학과, 형식과 더불어 출발하면서 형식을 해석하고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주는 해석학으로 나뉜다. 시학은 입증된 의미나 효과가 어떻게 획득되었는지를 물으며, 해석학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새롭고 보다 나은 해석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언어학적인 모델은 문학 연구가 시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학 작품이 자신이 얻어낸 효과를 어떻게 성취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현대 비평 전통은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여 개별 작품의 해석이 문학 연구의 결정적 요소가 되도록 만든다. 반면 문학적 능력을 기술하는 시학은 문학적인 구조와 의미를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관행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시학과 해석학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모호한 공통 분모들, 이를테면 텍스트에서 산편적으로 제공되어진 세부 사항으로부터 '등장 인물'을 창조해 내고, 문학 작품의 주제를 인식하고, 시와 스토리 사이의 의의를 측정할 수 있게끔 상징적 해석 형태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인지 따위의 질문들로 인해 오해가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 하면 '나는 배가 고프다'와 '나는 배가 아프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식처럼 확연하게 문학 작품의 의미가 파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에 있어서는 주어진 것으로서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현대 문학 비평이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시학은 개별 작품의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관행의 설명에 치중한다. 그리하여 시학은 독자들이 갖고 있는 문학적 능력을 해명하는 것에 열중한다. 문학적 능력이라는 관념은 독자와 텍스트의 상호 작용이 만들어내는 지식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독자 반응 비평으로 나아가는데, 이 비평 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의 의미란 독자의 경험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작품의 해석은 문학 작품이 독자와 만나는 일련의 방식 속에서 독서 스토리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시 이같은 독서 스토리는 문학 텍스트를 결국 독자의 '기대 지평'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이랬을 때 '독자 반응 비평'은 개별 문학 작품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특별한 종류의 대답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이 경향에 따르면, 문학 작품은 '계급투쟁','통합 경험의 가능성','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전복적인 에너지의 봉쇄','젠더 관계의 불균형', '텍스트의 자기 해체적 성격','제국주의의 폐색','이성애주의의 모태'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Spoonful
텍스트 읽기의 최저 낙원/담론과 현실 l 2008. 11. 8. 23:59



  4. 문학 연구와 해석 게임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담론들은 근본적으로 문학 작품의 해석 양태가 아니라, 단지 문화와 사회에 관해 제기되는 특히 중요한 몇 가지 설명일 따름이다. 이 이론들 가운데 상당수가 문학의 기능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거나, 담론적 기능의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함으로써 시학의 기획을 담당한다. 그러나 시학의 기획에 이 담론들이 기여하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해석학의 한 형태로서 이 담론들은 텍스트가 언어를 표적으로 삼아 도식화된 해석의 특정 형태를 야기시킨다. 이를 해석 게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이 게임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접하게 되는 대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그런 해석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텍스트에 있는 세부 사항을 어떤 식으로 우리의 대답과 연결시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해석 게임이 도출해 낸 몇 가지 해석의 특정 양태 가운데 선택이 문제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개별 텍스트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선택에 관한 논쟁은 결코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설사 무엇에 관해 결정해야 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디테일'이나 '특정한 시행(詩行)'이 어떻게 특정한 가설을 뒷받침하는가에 한정되어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그냥 아무렇게나 의미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비록 개별 텍스트가 '궁극적으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독서가 타당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려 애써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이 의미를 결정하는가라는 논쟁의 핵심적인 질문과 맞닥뜨려야 한다.

 

 

  5. 의도, 텍스트, 맥락, 독자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를 결정하는가? 우리는 때때로 발화의 의도가 곧장 의미를 결정하는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며, 때로는 의미가 언어 그 자체의 산물인 것처럼 텍스트에 있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맥락이라고도 말한다. 의도, 텍스트, 맥락, 독자―이 가운데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네 가지로 논쟁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의미가 이런 요소 중 단 한 가지 요소에 의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며 포착하기 힘든 것임을 말해 준다.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관점에 입각한 비평 전략은 작품의 해석이 저자의 내적 의도보다는 저자의 개인적  이거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에 더 밀착해서 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고 한 작품의 의미는 어떤 시점에서 저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불충분한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의미는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고, 게다가 단순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피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의미는 주체의 경험임과 동시에 텍스트의 속성이다. 따라서 의미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언제나 의미는 결정되어 있고 취소 불가능한 결정에 종속된다. 그리하여 의미에 관한 논쟁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래서 마침내 이 논쟁에서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총체적인 원칙이나 공식을 우리가 채택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의미란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는 공식을 채택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문맥은 언어의 규칙, 저자와 독자의 상황,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그밖의 어떤 것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의미가 문맥에 묶여 있다고 말하려 한다면, 문맥이란 경계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만 한다.


 
 6. 문맥, 그리고 경계

 

   의미는 문맥에 묶여 있지만 문맥은 경계가 없다. 앞에서 인용한 황동규의 시 '초가'의 경우,  수사학적 입장에서 역설적 표현과 미학적 관점에서 그로테스크를 언급할 수 있지만, 이 역설적 표현과 그로테스크의 채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의 암울한 독재 상황의 억압적 사회 구조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다시 해석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복원의 해석학과 의심의 해석학을 만나게 된다. 복원의 해석학은 작품 생산의 최초의 문맥을 재구성하려는 반면, 의심의 해석학은 텍스트가 의지할 수도 있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들을 폭로하려 한다. 전자는 저자에 대한 찬양이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며, 후자는 덱스트의 권위에 대한 부인이 주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복원의 해석학은 텍스트의 힘을 축소시킬 우려가 있는 반면, 의심의 해석학은 텍스트의 저자에게는 전혀 생소한 방식으로 참여함으로써 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오늘날의 문제를 재고하도록 도와 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가 있는 구분법은, 텍스트가 그 기능상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는 해석학적 입장과, 텍스트를 비텍스트적인 어떤 것의 징후로 보는 해석학적 입장 사이의 구분이 될 것이다.

 


  7-(1) 마무리 하나: 필자의 입장을 대신하여

 

   문학에 관한 이런저런 논쟁에서는 언어의 성격과 역할, 그리고 언어를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이론적 핵심이 되어 왔다. 문학 작품의 해석이 '경계 없는 문맥'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이 '언어'를 표지로 하여 이루어지는 창조적 산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탐구는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서 '텍스트의 해석'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언어학적 모델에 기반한 시학적 문학 연구 모델은 단지 입증된 효과만을 설명하려 하는 반면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의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해석학적 모델은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독자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텍스트가 무엇인가를 주장하려 한다면 반대로 독자 또한 텍스트에 대해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석학적 모델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7-(2) 마무리 둘: 남는 의문

 

   이 텍스트의 네 번째 장을 요약하면서 나는 두어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언어학적 모델에 입각한 시학적 문학 연구 방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시종일관 해석학적 문학 연구 모델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필자의 이 주장은 보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진술들로 명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가 이 글을 읽어 나가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이 어떻게 문학 연구에 있어서 시학적 연구 방법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필자의 구체적인 진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판단할 때 이 텍스트가 갖는 가장 중대한 문제점은 과도한 비약과 생략에 의해 주장이 개진되어진다는 점인데, 가령 언어학 모델이 어떻게 시학적 연구 모델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필자는 별다른 언급을 않고 있다.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언어학 모델과 문학 연구 방법으로서 시학적 모델 사이엔 어떤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가? 있다면 그 연관성의 내포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요약한 이 장에서 저자는, 텍스트의 의미는 결국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문맥은 원칙적으로 경계가 없는 것이라서 여기에는 '언어의 규칙, 저자와 독자의 상황,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그밖의 어떤 것들'이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의 규칙, 저자와 독자의 상황,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그밖의 어떤 것들'이란 바꿔 말하자면 텍스트의 생산과 관련된 총체적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마침내 '문맥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진술은 '현실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진술과 무엇이 다른가? 언어의 규칙, 저자 및 독자의 상황, 그밖의 어떤 것들이 결코 현실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 진술은 텍스트에 대한 현실 우위의 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는 진술의 동어 반복이 아닌가? 이랬을 때 텍스트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훼손당할 염려는 없는가?


Posted by Spoonful
텍스트 읽기의 최저 낙원/담론과 현실 l 2008. 11. 8. 23:36


시민 사회의 예술적 반영으로서의 헤겔 미학
-[헤겔미학입문], 토마스 메춰-페터 스쫀디 공저

 



1.헤겔과 예술 사회학을 위한 철학적 정초


   헤겔 미학은 예술철학 분야에 있어 시민사회적 사상의 최고 정점을 이룬다. [미학]에서 헤겔은 통일적 방식으로 시민사회 동시대인들의 예술 이론이 지니는 진보적 경향을 총괄했으며, 예술과 문학의 역사 철학적 영역 전반을 다룬다. 헤겔의 지속적인 업적은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미학의 범주적 근본 구조로서 체계적으로 파악한 것이며 예술 철학적 분석의 중심부로 그 문제를 확립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헤겔에 의하면, 미란 "감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속에서 실현된 이념"으로 파악된다. 헤겔은 '예술미'를 '이념상'이라 부른다. 그것은 단지 '감각적 질료의 추상적 통일'인 '자연미'의 추상적 형식과는 달리 예술미는 "미에 적합한 현실성이며 예술의 특수한 감각적인 객체 가운데 감각적인 표상과 직관을 위해 형상화된 이념'이다.
   결국 예술은 총체성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주관과 객관의 과정적인, 변증법적인 운동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 예술 속에서 드러나는 이념은 주관 정신과 객관 정신이라는 주관과 객관의 통일성이라는 의미에서 총체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은 감각적인 가상을 매개로 하는 인식 또는 지식으로 규정된다. 이랬을 때 헤겔이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으로서 현실성이라 부르는 예술의 '내용'은 사회적 실천이며 역사적 과정이며 '우리들 현존의 총체적 내용'이다.
   보편적 세계 상태이론, 상황이론, 행위이론 등을 통해서 제기되는 헤겔의 미학은 인간중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진정한 미와 예술의 내용과 중심점으로서 인간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적인 것은 헛된 추상물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로서 충만한 개체성이며 자기 완결된 주체이다. 그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적 개체성 속에 사회적 성격이 풍부하게 드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미적 세계와 경험적 세계와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미적 세계 내부에서 형식적으로 조직된 내용은 실제적인 사회 과정으로부터 창출된다. 미적 세계와 경험적 세계 사이에 유사성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것은 작품으로 드러난다. 작품 세계는 경험적 사회가 실천 속에서 이루어 놓은 형태들 속에 등장하는 실재적 세계를 감각적이며 직관적 구체화의 상태로 옮겨 놓은 세계이다.



 2.헤겔의 문학 이론-헤겔 미학 해설


    (1)자연과 예술
   헤겔은 그가 전개시키고자 하는 학문의 어의에 대하여 명확히 한 다음 미학이란 학문의 대상을 다룬다. 헤겔은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예술미만이 미학의 대상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은 칸트 미학과 대립점을 형성한다.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예술관을 지니고 있던 칸트에게 있어 예술은 자연의 정확한 재현을 포함하게 되며, 이는 필연적으로 자연 모방으로서의 예술이 미학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헤겔에 따르면, 미란 모든 것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는 자로서 '진실하고 우월한 존재'에 의해 추구된다.
   헤겔에게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연 자체, 즉 감각적인 실재성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직접적인 것의 세계가 정신 속으로 함입되고 정신이 이런 세계 속에서 자신을 담지할 때, 그리고 이런 세계가 예술 속에서 가상으로 될 때 비로소 이중적 기만은 지양되고 내적-외적 자연의 사물들이 그들의 진정한 현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헤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변증법적 사유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헤겔의 변증법은 대립과 통일로서의 정신과 자연, 자유와 필연, 보편자와 특수자, 본질과 현상 사이의 심원한 분열을 극복-화해시키려는 추구이다.
   예술은 그 가상적 성격으로 인해 철학적인 취급의 가치를 갖게 된다. 자연과 정신은 자신을 넘어서 타자를 단지 소원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로서 그 자신의 소외로 파악하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재인식하여 소외 혹은 소원함을 극복해야 한다. 헤겔의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은, 이성과 현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서의 통일이 헤겔 자신에 있어서는 결국 현실 자체의 원칙으로서 주장돠었음에 반해 칸트는 그것을 현실성의 본질로서가 아니라 이성의 본질로 요청했다는 점에 있다.
     
   (2)시민 사회와 예술
   헤겔 미학에서 '산문성'이란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8세기 이래 점점 증대되는 사회적 억압과 구속이 의미하는 강요된 일면성의 경직화, 즉 대립의 고착화에 대한 헤겔의 경험적 파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빌헬름 마이스터는 이같은 경직된 고착화를 예술로써 극복하려 한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예술적 고행은 그가 현실 속에서 결핍된 채로 주어지는 조화, 즉 세계와의 화해를 실현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빌헬름 마이스터가 시민사회의 모순을 예술적으로 극복하려 한다면, 철학은 그 자체로서 진리에의 전진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자체로서 총체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객의 대립과 지양에서 현실에 대해 문을 닫아 건 낭만주의 예술이 주관적 열광으로 도피해 버리는 것에 대해 헤겔은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현실의 모방으로서 예술을 파악하는 것은 오류이며, 또한 현실의 주관적 왜곡 역시도 오류이다. 헤겔에 의하면, 진정한 정신으로서의 예술이란 "즉자-대자적인 것으로 그럼으로써 그것은 결코 대상성 저 너머에 있는 추상적 본질이 아니라, 바로 대상성 내부에서 유한한 정신에 의해 모든 사물의 본질을 상기시키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것은 헤겔 미학이 보다 폭넓은 외연과 내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의 미학을 역사적 근거로서 인식을 향한 총체성 속에서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무리 전체로서는 회의적이지만,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 언제나 우리의 모범이자 스승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3)예술형식의 변증법
   헤겔은 예술사 파악의 세 가지 단계를 구분한다. 즉, 이념이 감각적 예술 형태 속으로 삼투되어 그것과 완전히 화합하고 나서 다시 극복되며, 이제는 더 이상 감각적 현존 방식이 아닌 종교와 철학에로 나아간다. 이런 과정의 세 단계가 곧 헤겔이 예술사를 파악하는 기준으로서 세 예술 형식과 대응한다. 그것은 바로 상징적 예술 형식, 고전적 예술 형식, 그리고 낭만적 예술 형식을 의미한다.
   헤겔이 상징적 예술 형식을 자신의 체계 속으로 도입한 것은 물론 자기 시대의 보편적 경향과 부합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시대 동료들의 역사적 연구 결과를 그의 미학 속으로 소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직관에 대해 직접적으로 현전하거나 주어진 외적 실존이지만 그것은 직접적 상태 그대로 취해질 바가 아니라 나아가 하나의 확대된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상징에서는 동시에 두 가지가 구별될 수 있는데, 첫째가 의미이고 두 번째가 의미의 표현"이다. 헤겔에 의해 그것은 의미와 형상의 통일이라든가, 환상적인 상징 예술, 형식과 내용의 완미한 조화 등의 개념을 거쳐 본래적 상징 예술로 그 개념을 진전시켜 간다. 이 때 다시 등장하는 것이 숭고로서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문학에만 한정된다.
   고전적 예술 형식은 역사 철학적 가운데에서 두 번째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형식에서 비로소 예술미 즉 이념상에 관한 헤겔의 규정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고전문학에서 인간의 해로운 적으로 나타나면서 신에게 바쳐진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영웅이 그들을 죽임으로써 신들의 계열에 서게 된다는 의미에서 동물들은 보여진다. 이집트의 경우 기본적 자연의 신들로 동물들이 숭배되었던 반면 그리스에서 특정한 죄를 지은 자가 벌로써 동물로 격하되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전적 미에 대해 헤겔은 고대 그리스 신상들의 미가 불러일으킨 인상을 영감적이로 확신에 찬 어조로 표현한다. 오늘날 소설과 서사 문학인 희곡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과는 반대된다. 그러나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과 매개되어 있고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과 매개되어 있다. 이런 생동하는 매개의 소멸이 낭만적 예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낭만적 예술 형식은 고전적 예술 형식에 반대되고 또한 그 반영되는 모습이 상징적 예술 형식과 일치하고 있다. 헤겔이 이해하고 있듯이 낭만적 예술 형식은 오랜 기간의 역사적 시기와 다양한 양식을 포괄하고 있다. 즉 헤겔의 낭만적 예술 형힉의 개념은 보통 말하는 고전주의와 리얼리즘 사이 수십 년을 의미하는 우리들 당대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헤겔에게는 낭만적 예술 형식의 기초는 고전적 예술 형식 이후의 총괄적인 예술로서 중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모두를 의미한다. 이념의 감각적인 가상화로서의 예술미는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 내부와 외부,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며 상호 매개이었다. 낭만적 예술 형식의 이러한 이중성은 정신과 자연,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새로운 분열로서 미의 과정 속에서 고전 시대의 행복한 이념상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로 상징적 예술 형식이 보여 준 분열을 반복한다. 헤겔은 낭만적 예술의 두 가지 근본 유형을 구분한다. 첫 번째 유형은 행동하는 유형이며, 두 번째 유형은 그들의 내면성 속에서 살고 있는 성격이다. 따라서 '돈키호테' 속에서 아직 기사도의 낭만적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에에 새로운 허구를 향한 모험적인 기괴한 사건 속에서 언제나 이런 이념상의 낭만적 세계를 응징하게 되는 산문적 세계가 대립되어 있는 한, '돈키호테'의 영웅은 동시에 후세기의 소설을 준비한 것이며 또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로부터 노발리스, 티크, 아이헨도르프, 모리크의 낭만주의적 발전과 낭만적 예술가의 시대를 넘어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독일 문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4)개별 예술들의 체계
   헤겔은 의미에 의해, 재료에 의해 예술들을 구분한다. 헤겔이 양 요소들 즉 이념과 감각적인 것의 상호대립으로 미의 과정을 파악하는 발전의 초기에는 양자 사이의 분열로서 의미와 형상간의 대립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것이 상징적 예술 형식의 특징이다.
   문학의 질료로서 음향은 정신의 표출을 위한 수단으로 직관과 표상의 매체로 되는 것이다. 음악에서는 음향 형성이 바로 자기 목적이지만, 언어에서는 표현 수단이요, 내용의 기호가 된다. 문학의 질료가 비록 감각적 음향이긴 하지만 그것의 속성은 감각적 질료성에 있다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하나의 기호로 작용한다는 점에 있는데, 이것이 헤겔 [미학]에서 문학에 부여되는 가치와 일치한다.
   헤겔은 시문학에 상반되는 개념을 산문이라고 불렀다. 헤겔에게는 전적으로 색다른 산문 개념이나 시문학에 근거한 개념의 공허한 수사학적 적용이 중시되는 것이 아니라 헤겔이 언급하려 했었던 보편적인 세계 상태의 형식과 예술의 형식이라는 동질적 차원의 사실을 파악해야만 하는 개념이 중시됨을 이해해야 한다. 구체적 총체성은 서사적 문학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보인다. 잠언시나 철학적 시가 보편적인 것에 머무르는 반면에 서사시는 헤겔에 의하면 한 행위의 사건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이 바로 시민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의미이다
Posted by Spoonful
텍스트 읽기의 최저 낙원/담론과 현실 l 2008. 11. 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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