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onful의 블루스 블로그로 바로가기
http://blog.paran.com/spoonful
Bernard Allison - Tin Pan Alley (No Mercy)
Tin Pan Alley
틴 팬 앨리는 먼로 로센펠드(Monroe Rosenfeld)라는 이름이 한 저널리스트가 우연히 이 거리를 걷다가 그 곡 쓰고 연주하고 소리가 마치 냄비(Tin)과 프라이팬(Pan)을 두들기는 소리로 가득 찬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제롬 컨(Jerome Kern) 조지 거쉰(George Gershwin) 어빙 벌린(Irving Berlin)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 콜 포터(Cole Porter) 등 당시의 기라성 같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32소절 중심의 대중적 팝' 음악을 창조했다. 그것은 미국의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재즈에 이어, 마치 야구와 같이 어떤 나라에도 없는 미국의 고유한 창조물이었다. 제롬 컨의 'Smoke gets in your eyes', 조지 거쉰의 'Summertime', 어빙 벌린의 'White Christmas', 리처드 로저스의 'My funny Valentine', 콜 포터의 'Night & day' 등 오늘날 미국 팝송의 '표준'이 된 불멸의 명곡들이 그것이었다. 또 프랭크 시내트라, 엘라 피츠제럴드, 냇 킹 콜 등 명가수들이 이 '스탠더드 팝'을 불렀다. 특히 틴 팬 앨리 팝은 1920년대에 북부 대도시로 올라온 재즈와 결합하면서 20세기 전반 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했다. 재즈가 연주를 해주고 틴 팬 앨리는 '곡'을 제공한 것이다. '틴 팬 앨리와 재즈 없이 미국의 대중음악은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특히 틴 팬 앨리는 지명이기도 해서 '미국 대중음악의 메카'로도 불리며, 작곡·작사가가 중요한 만큼 그들의 모임인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 로큰롤 출현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ASCAP은 로큰롤의 기를 꺾기 위해, 이른바 패욜라(Payola)사건을 터뜨렸지만 로큰롤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2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은 접근 방법을 달리했다. 그들 캐럴 킹(Carole King)과 제리 고핀(Gerry Goffin) 콤비, 닐 세다카(Neil Sedaka)와 하위 그린필드(Howie Greenfield) 콤비, 배리 맨(Barry Mann)과 신시아 웨일(Cynthia Weil) 부부 팀, 불세출의 콤비 리이버 앤드 스톨러(Leiber & Stoller) 그리고 닐 다이아먼드(Neil Diamond) 등은 틴 팬 앨리의 작곡 전통에 '뉴 뮤직' 로큰롤의 거리 숨결을 결합했다.
이들의 신구(新舊) 결합에 따른 소구력의 확대로 틴 팬 앨리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차트를 장악하며 다시 맹위를 떨쳤다. 이 때의 중심지가 브로드웨이 1619번지 소재의 브릴 빌딩(Brill Building)과 그 일대였다. 지금 틴 팬 앨리의 원형을 간직한 팝은 없다. 하지만 그 유산이라고 할 '집약적 생산' 즉 공장(factory) 개념은 '좋은 곡'을 만들어 '좋은 가수'를 붙이는 현재 '음반산업 메커니즘'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를테면 틴 팬 앨리는 스탠더드 팝과 동일어로서 블루스 재즈 포크 등과 달리 자연발생적인 음악이 아닌 '만들어진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1950년대 이후 최희준 현미 패티김 배호 등 미8군 쇼 출신 가수의 '미국식 발라드'를 통해 재즈가 결합된 틴 팬 앨리 팝 양식의 음악이 소개됐다. 그리고 이 음악은 트로트와 대항전선을 이루며 지배적 가요의 두 축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Tin Pan Alley 2
틴 팬 앨리(Tin Pan Alley)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뉴욕 맨해튼 28번가와 브로드웨이 사이 일대를 일컫는 말로, 팝음악 관계자, 대중음악계를 의미하는 말처럼 사용되는 말이지만 동시에 도시에 거주하는 백인 중산층의 음악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19세기 말엽 이곳에는 미국 대중음악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머물고 있었다. 조지 거슈윈과 그의 형 아이라 거슈윈이 이곳에서 <포기와 베스>,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했고, 어빙 벌린은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음악의 대명사인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작곡했다. 틴 팬 앨리는 백인들의 조상이 유럽으로부터 가져온 클래시컬한 달콤한 멜로디와 하모니에, 재즈의 리듬감, 컨트리 음악의 가사에 약간의 블루스가 섞인 음악이었다. 틴 팬 앨리에는 달콤하고 서정적인 가사와 부드럽고 세련된 멜로디가 주축이 되는 음악이었고, 싱어 송 라이터가 아니라 전문적인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는, 때로는 가수의 개성은 무시되어 누가 불러도 괜찮은 그런 음악이기도 했다(실제로 스탠더드 팝 명곡들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 누가 불렀는지 알 수 없는 곡들이 상당히 많다). 축음기가 발명되고, 음반산업이 성장하면서 미국 대중 음악은 전문적인 산업, 연예 비즈니스로 변모해갔다. 193-40년대 미국의 대중음악은 흡사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처럼 컬럼비아, 빅터, 데카, 캐피톨, 엠지엠, 머큐리 등 소위 6대 메이저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라디오에서 '노변한담'의 위력을 발견하게 되고, 영국의 왕실이 성탄절 왕실방송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독일의 괴벨스가 그 놀라운 선전선동능력을 인정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기간 동안 라디오는 최고의 정보전달 능력과 정치적 도구로서의 효용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것을 자신들의 수익 증대에 활용하고 싶어하는 기업들의 구미를 당기게 된다. 라디오는 가난한 이들이나 부유한 이들, 상류사회나 하층계급의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화제를 던져주었고, 사회일반의 문화가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 기간 동안 전장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라디오 방송을 청취했고, 라디오 편성시간표에 자신의 생활을 맞춰가게 되었다. 그들은 라디오를 통해 뉴스속보, 스포츠 중계, 명사초청쇼, 연속 홈드라마, 코미디쇼를 그리고 오손 웰즈 같은 인물이 꾸민 가상의 외계인 침공 소식을 들었다. 사회 전체가 라디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 음악은 특히 라디오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 청각이 미치는 범위의 한계를 깨뜨릴 수 있었다. 물론 1914년 이전에 이미 축음기가 개발되었으나 그것은 빌리 홀리데이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녀는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기 위해 부유한 창녀의 하녀로 일한 경험이 있다) 축음기와 음반을 모두 소유한다는 것은 일정한 경제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통해 음악은 진정한 대중음악이 되었다. 초기 대중음악을 주도한 것은 오늘날 과 같은 솔로 가수들이 아니라 밴드였고, 재즈에서 보컬은 악기 연주자들의 휴식을 위한 중간 휴지부를 메워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였다(그래서 재즈에서 보컬보다는 연주가 재즈의 본령이라고들 말하는 것이다). 스윙 붐을 탄 재즈 빅밴드들이 유행했고, 틴 팬 앨리에서도 역시 규모가 큰 밴드들이 유행했다. 솔로 싱어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재즈에서 스윙붐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라디오 방송이 본격화되면서 틴 팬 앨리의 악보출판업자들과 방송사간의 마찰이 시작되는 193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었다. 오늘날 인터넷과 MP3음원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이 저작권 소유자들과 이용자간에 마찰을 빚게 된 것처럼 당시에도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은 새로운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부터 보컬이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